선택하라, 신앙을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강론

선택하라, 신앙을 -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강론

 

 

송용민 신부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매 순간이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들을 기준으로 내가 해야할 일이나, 만나야할 사람들의 순서를 정하고, 일의 가치들에 따라 선택적 가치 결정을 해나간다. 인간은 논리적으로는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며, 소중한 가치들을 먼저 선택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라 생각되지만, 실제로 인간은 그렇게 가치 선택의 기준을 보편적인 상식의 기준으로 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들에 최대한의 가치를 부여해서 살아가는 것이 보통이다보니 언제나 선택적 가치 결정 이후에는 후회와 회한이 남기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이 선택한 가치들이 정말로 소중하고 내 인생에서 바꿀 수 없을 만큼의 소중한 것들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자신이 열정을 쏟고 있는 일일 수도 있고,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이나 재산일 수도 있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기호식품들, 술이나 담배, 여성들에게는 즐겨보는 TV 드라마일 수도 있다. 젊은 이들에게는 스마트폰일 수도 있고, 때로는 내가 집착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소중한 것이란 내게 소중하다는 의미이지, 그것이 언제나 진정으로 내가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온전한 인간이 되어가는 데 소중한 보편적 가치를 말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야말로 주관적인 자기 기호에 따라 인생의 보편적 가치들이 하찮은 것이 되기도 하고, 소중한 것이 되기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신앙 선조들에게는 무엇이 가장 소중했을까? 조선 왕조 500년 역사 속에서 천주교 신앙이 전래된 1784년이래도 네 번의 큰 박해와 잦은 시련 속에서도 굳굳하게 천주신앙을 지켜낸 우리 신앙 선조들과 순교자들을 움직이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를 알려면 당대의 사회적 현실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다. 이미 중국 대륙에 마태오 릿치를 통해서 전래된 가톨릭 신앙은 천(天)의 주인(主)인 인격적 신을 섬기는 종교로서 중국의 천명(天命)사상을 통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한 마디로 하늘의 보편적 가치를 인격적 신의 주재로 이해한 중국사상가들은 가톨릭 신앙의 진수를 천의 뜻이 땅에 펼쳐지는 명(命)의 의미를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을 통해 이루어진 신앙의 신비로 받아들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신 천자(天子) 였던 셈이다.

 

그런데 동양에서는 본래 이 천명을 받아들여 이 땅에 실현하는 인물을 왕으로 보았다. 왕은 하늘의 뜻을 묻고, 땅의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덕을 지닌 군자 혹은 성인으로서의 존재로 인정되었다. 서양에서의 군주가 폭력과 권력으로 백성들을 수탈하고 지배하는 왕권과는 사뭇 달랐다. 조선 시대에도 왕의 존재는 이런 천명 사상의 영향으로 현군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

 

하지만 천주교 신앙이 전래될 당시에는 왕은 이미 왕권쟁탈전에 의한 당파싸움의 희생양이었고, 탐관오리들과 기득권층들은 백성들을 수탈하고, 자신들만의 이득을 위한 정치적 책략은 물론이거니와, 학문 세계에서도 탁상공론식의 유학자들의 논쟁이 백성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계급사회를 고착시키고, 사회적 신분질서에 대한 높은 벽을 만들어 서민들의 곤궁한 생활은 물론 희망 없는 절망의 삶이 지속되었었다.

 

그런 가운데 일군의 실학운동을 펼친 이들을 중심으로 천주 신앙에 대한 서적을 중국에서 가져온 후 탐독하면서 그들이 찾던 참된 신앙의 빛을 발견한 것이다. 우리 신앙 선조들은 이미 하늘에 대한 보편적인 신앙이 있었고, 그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는 존재가 가장 겸손하고 낮은 자로서 백성들을 섬기고, 가난한 이들과 일생을 나누며 살았으며, 스스로 인류의 죄와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인간의 한(恨)의 정화와 승화가 이루어지는 참된 종교심의 완성을 보았다. 한 마디로 천주 신앙은 신앙 선조들에게는 인생에서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절대적 신뢰와 희망의 단어가 된 셈이다.

 

그래서 많이 배우지도 못했던 초기 천주교 신자들은 배교한다는 말 한마디로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천주님을 무시하고, 배반하는 삶은 설령 자신에게 물질적인 풍요가 보장되어 있다 하더라도 참 생명의 삶이 아니기에 기꺼이 목숨을 내 걸고 그 신앙을 지키려고 했던 것이다. 엄청난 고문과 협박,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만여명의 순교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지킨 것은 바로 이 천주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 덕분이었다.

 

김대건 사제 역시 1821년 솔뫼의 순교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열심한 순교 신앙의 영향을 받고 자랐다. 방인 사제의 필요성 때문에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과 함께 뽑혀 16세의 나이에 마카오로 유학길을 떠났다. 박해 받는 조국에 복음의 빛을 전하고자 한 열정은 결국 25세에 사제가 된 이후 불과 1년 만에 관헌에고 체포되어 온갖 고문과 회유를 받았지만, 결국 천주 신앙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증거하면서 영광스럽게 순교한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었다.

 

우리 시대에는 분명히 과거와 같은 박해나 순교가 강요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 휘강이의 칼날 보다 더 무섭게 신앙인들을 헤집고 다니는 무서운 배교의 유혹들이 도처에 깔려 있음을 의식할 필요가 있다. 불신앙과 세속화의 물결이 바로 그것이다. 악의 세력들은 신앙인들을 하느님과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해 인간이 스스로 자기 모순과 죄로부터 합리화될 수 있는 세속주의의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문명이란 이름으로 대하고 있는 자본주의이며, 소비와 쾌락을 중시하는 현대 자본주의의 고삐풀린 망태가 여느 때의 휘강이의 칼날 보다 더 무섭게 우리 영혼을 베고 있는 것이다.

 

불신앙과 세속화의 유혹은 오늘날 광범위한 매스미디어와 모바일 혁명을 통해 빠르게 유포되고, 인간의 영혼의 가치들보다는 세속적인 물질적 가치들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하는 불신앙의 현실을 만들어 내고 있다. 이런 현실이 사실이라면 과연 우리 시대에 진정한 신앙은 어디서 재발견 될 수 있을까?

 

사실 우리 시대에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거나 목숨이 위태롭게 되지는 않는다. 순교성인들이 피로 지킨 신앙을 우리가 편안하고 때로는 한국사회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큼의 호감도 누리고 있다. 8월에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문을 하실 만큼 한국교회는 성장했고, 그 규모 역시 만만치 않다. 500만명이 넘는 신자 수나 비종교인들의 종교적 선호도 천주교가 높다. 이런 면에서 과연 천주교 신자로서의 자긍심을 어떻게 견지할 수 있을까? 공공 장소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기도하고, 대중식당에서 성호를 그으며 기도할 수 있는 용기부터 이 시대를 고민하는 대다수의 사람들과 더불어 신앙을 지킬 수 있는 노력도 필요할 듯 싶다.

 

분명히 우리가 간직한 천주교 신앙은 200여년전 피땀으로 지켜낸 우리의 신앙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외적인 교회의 성장과 아시아와 세계가 부러워하는 약동하는 교회의 모습과는 달리 시간이 지날 수록 한국 천주교의 위상이나 신앙 현실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음을 느낀다. 늘어가는 냉담율과 신자들의 사회적 의식구조, 신자로서 느껴지지 않는 하느님의 체험과 신앙의 참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는 냉랭함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떠 안고 고민해야 할 신앙의 문제들이 많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신앙의 세속화가 심각하게 진행되면서 이제는 신앙은 하나의 선택사항이요, 교회 생활은 문화 생활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언제나 중요한 것에 대한 선택은 자신들의 관심이 먼저이고 신앙의 요청은 언제나 가장 나중에 선택되는 불필요한 것이 되어 버렸다.

 

참된 신앙은 하나의 선택의 연속이다. 그것은 인간이 세속적인 가치들, 가령 물질적인 욕망과 이기적 탐욕을 이끌어내는 재산, 명예, 건강 등에 매달린다 해도 인간은 한 번은 자신이 믿던 그런 가치들로 인해 받게 될 고난을 넘어서는 영적인 결단이다. 인간이 영적 공허감을 느끼고, 자신의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심을 깨달을 때 신앙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된다. 선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인생 살이에서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모순들을 생각하면, 신앙은 그런 가운데 참된 삶의 가치란 세속적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있는 참된 기쁨임을 재차 강조하는 것이 복음의 빛이 아닐까 생각된다.

 

2014. 7.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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