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함을 사랑하라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순교자 대축일 강론

나약함을 사랑하라 -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순교자 대축일 강론

 

 

송용민 신부

 

 

나약함. 근대 이성이 문명을 발전시킨 이래 인간이 극복해야할 가장 큰 단어는 인간의 나약함이었다. 자연의 힘 앞에 순응해야 하는 인간,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 신 앞에 맹종해야 하는 인간. 그런 인간의 나약함을 이겨보려는 자아의 재발견이 인류의 문명사회를 건설했고,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 사회에서 인간 이성이 가진 합리성과 지성적 능력의 계발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나약함을 극복하는 유토피아 건설의 출발점이었다. 그런 근대 이성은 인간을 심리적으로 쉽게 냐악함에 빠지게 하는 감성적인 나르시스나 낭만, 멜랑콜리와 같은 감수성의 영역은 인간 완성에 걸림돌이 되는 것인양 치부하였다.

 

인류가 합리적 이성으로 계몽되고 이성이 도구화되면서 인간이 지닌 본성적 아름다움은 획일화되었다. 그 결과 아름다움을 찾고 느끼며 예술화하는 인간의 감성 영역에 대한 목마름이 더욱 커져갔다. 나약함은 단순히 인간 본성의 죄성(罪性)을 뜻하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의 나약함을 본성적으로 인정할 때 참된 인간이 된다. 문명은 인간의 냐약함을 감추거나 극복하려해왔기 때문에 흔히 겪는 자기 모순의 삶을 견뎌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마치 시지프스의 신화처럼 힘껏 돌을 굴려 산 꼭대기에 올려놓아도 이내 다시 떨어져버리는 운명의 굴레에서 평생 갇혀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신앙은 본성적으로 나약함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 나약함은 인간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자포자기식의 태만과 좌절과는 차원이 다르다. 인간 스스로가 넘어 설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내가 아닌 하느님의 영의 활동 공간을 내어주는 결단을 통해서만 신앙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은 지식이나 이성의 능력과는 차원이 다른 또 다른 인식능력이라고 말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신앙 없이 살 수 없다. 어떠한 삶의 차원에서도 믿음의 영역은 생존과 공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 초기 역사에서도 이 나약함의 신비는 예수의 제자들에게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들이 바라고 기다린 메시아는 질곡에 빠진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할 다윗의 후손, 즉 다윗 왕국의 영화를 되돌릴 힘있는 메시아였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제자들은 자신들의 스승 예수가 힘없이 지도층에 붙잡혀 혁명과 개혁은 커녕 십자가를 지고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좌절과 실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들 가운데 베드로는 가장 충직한 제자였고, 누구보다도 이 예수 공동체를 이끌면서 장차 오실 메시아의 왕국에 대한 꿈에 부푼 인물이었다. 그의 우직한 신앙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 16, 16)라는 고백에 이른다. 하지만 알다시피 베드로는 예수님이 참된 메시아는 이사야서에 예언된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이라는 것을 예고했을 때 자신의 뜻과는 다른 메시아관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반대를 하다가 예수님께 '사탄의 자식'이란 혹독한 말까지 들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절대로 예수님을 버리지 않겠다는 확신은 결국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나는 그를 모르오"라는 세 번에 걸친 배반을 통해 좌절을 맛본다. 자신의 배반을 예고한 예수님의 슬픈 눈을 바라본 베드로의 마음은 표현할 수 없는 삶의 좌절 그 자체였다. 한 마디로 베드로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 자신의 능력과 신념 속에 살아온 인간이 맛보는 막장을 보게 한다.

 

사도 바오로 역시 경건한 바리사이였다. 그에게 율법은 생명이요,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이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오히려 이를 넘어서려 했던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협오감과 증오는 열정적인 바리새이였다 바오로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마스커스로 그들을 잡으로 가는 길에 그는 섬광과 같은 빛을 만나 눈이 먼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바오로는 그 한 순간에 자신이 보고 듣던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변화시킨다. 한마디로 극적인 회심이다. 자신의 신념과 율법 정신을 가장 소중히 여겼던 그에게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의 전사로 바뀌게 한다. 신념이 낳은 인간의 만용의 역사가 바오로에게 비춰진다.

 

베드로가 부활하신 예수님으로부터 자신의 죄와 좌절로부터 해방되는 한 마디,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요한 21, 15-17 참조)를 통해서 완전한 치유와 해방을 체험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열정적인 사도가 되었다. 바오로는 이제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설교가로 사도로 복음의 기쁨을 이방인들에게 열정적으로 전한다. 박해와 모욕,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 끝에 그는 자신의 생을 그리스도께 바친다.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는 의로움의 화관이 나를 위하여 마련되어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관이신 주님께서 그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2티모 4, 7-8) 

 

베드로와 바오로는 나약함과 자기 기만에 빠진 두 인간의 원형을 보여준다. 예수는 이 두 제자들의 나약함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복음의 힘을 보여주고자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 고백에 하느님께서 그의 냐약함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큰 뜻을 미리 알려주셨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8-19)

 

가톨릭 교회는 2천년 동안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신앙 위에 세워준 이 교회를 굳건하게 지켜주셨다. 비록 역사 속에서 인간의 오류와 죄로 인해 교회가 복음의 뜻과 다른 길을 걸은 적이 있지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분열되고 죄를 진 것이 아니라, 교회를 구성하는 신앙인들의 나약함과 죄로부터 기인한 것이었기에 교회는 분열 없이 오늘날까지 하나의 그리스도 교회로 이어져 오고 있는 셈이다. 사도 바오로의 설교와 믿음은 신앙 공동체가 살아가는 지침과 확신을 심어준 힘이 되었고,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의 단일성을 지키는 힘이 되었다.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들은 하느님 백성을 위해 봉사하는 종들의 종이다. 교황의 역사가 가톨릭 교회의 부패의 역사라고 치부해버리는 개신교 교단들의 날카로운 비판에 맞서기에 앞서서 교황직은 그 자체로 가장 낮은 곳에서 하느님 백성을 위해 살아야 하는 베드로의 삶을 이어받은 사도적 교회의 본질에 속한다. 비록 교황의 인간적인 면모 속에 베드로와 같은 나약한 면들이 역사 안에서 반복되어 왔지만, 하느님은 인간의 나약함 속에서 오히려 당신의 강함을 보여주시려는 역설의 신비를 일깨워주신다. 하느님은 낮은 자를 일으키시고, 강한 자를 내치신다는 믿음의 고백과도 상통한다.

 

교황 주일에 가톨릭 신앙인들은 교황님에 대한 존재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여느 교황님들과는 달리 교황의 권위를 내려 놓고 참된 삶의 권위를 보여주는 소박하고 겸손한 모습 속에서 우리는 베드로가 보여준 인간의 나약함이 어떻게 인간을 온전하게 완성시킬 수 있는 힘을 지니는 지 보게 된다. 일련의 교황님의 파격격 행보들은 그분이 가진 신앙이 교황으로서가 아니라, 베드로의 모습처럼 예수님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시려는 뜻이 무엇인지를 늘 물으신 대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강조하시는 복음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시대 베드로와 바오로의 순교를 통해 이룬 신앙 공동체의 힘을 되찾는 것이라 생각된다.

 

2014. 6. 29.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순교. 로마에서 두 분의 순교는 초대 교회부터 로마교회에 대한 존경을 일으켰고,

교회의 중심지가 되게 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열정적 삶은 순교적 삶을 통해

 세상의 어떤 고난도 복음의 기쁨을 이길 수 없음을 고배한 신앙의 증거였다. 

 

로마 바티칸 교황청의 교황님 개인 경당의 제단 좌우에 걸려 있는 이 두 장의 벽화를 보며

독일 유학 시절에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을 개인적으로 알현할 때 느꼈던 감동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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