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말씀신부님의 강론말씀 코너입니다.
  • 2014.07.03
    7462014.07.03

    사랑하라. 그러면 알리라 -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송용민 신부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예비신자 기간에 배운 가톨릭 교리 이외에 별도로 교리교육을 다시 받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앙 생활을 해온 가톨릭 신자들이라도 주로 주일미사 참례나 활동 중심으로 신앙 생활을 해온 경우 가톨릭 교리에 대해 남들이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신자들은 손에 꼽는다.

     

      그런데 가톨릭 교리들 가운데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이자 핵심인 삼위일체 교리야말로 모든 신자들이 가장 당혹해하는 교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려운 교리가 우리 신앙의 중심인지를 생각해보는 경우는 별로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늘 성호경에 익숙한 신자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성삼위의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그 의미가 무엇인지 잘 생각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분명히 하느님은 절대 전능하신 유일하신 한 분이셔야 하는데, 우리는 왜 그 하느님을 세 분의 다른 분들처럼 별도의 이름을 부르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도 있다.

     

    삼위일체 신앙을 이해하는 첫 번째 길은 먼저 내가 하느님을 어떤 분으로 부르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누구든지 이름이라는 것은 그 사람을 표현해주는 가장 완전한 표징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하느님을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그건 내게 사랑이 많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모든 이들에게 치유와 해방을 주시는 하느님'을 부른다면, 그건 내가 아프거나 병들었고, 무엇인가에 묶여 있는 속박된 삶을 살아가기에 치유와 자유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만일 내가 '용서와 자비의 하느님'을 부른다면 그건 내가 지은 죄의 깊이를 느끼고 이에 대한 참된 용서를 목말라 한다는 뜻이다. 사실 하느님의 이름에는 숨겨진 우리들의 바램이 있다. 그래서 대부분 하느님을 부르는 우리는 그분이 내게 필요해서 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맞다. 우리는 하느님을 필요로 한다. 목말라 한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은 내게 필요한 분이라고 믿기 시작하면, 그분은 내가 필요로 할 때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그렇게 원하는 때에 나와서 내 청을 들어주셔야 한다. 하느님은 마치 자동판매기처럼 내가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주셔야 진정한 하느님 자격이 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절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뻔한 길을 가지 않으신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되, 하느님의 방식을 고집하신다. 만일 하느님을 내가 필요로 하는 분으로 여긴다면 아마 우리는 기도하면서 청하거나, 간절히 바란 일들이 이뤄지지 못할 때 절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분노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믿는 하느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느님은 최소한 하느님 다운 분이셔야 한다. 그러려면 우리가 사도신경에서 외우는 첫 마디,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이셔야 한다. 전능하신 분, 하늘의 주인이신 분, 그리고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 이 정도의 이름이라면 그분은 내 인생의 시작과 끝을 책임지시는 분이시고, 내가 비록 명시적으로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하더라도 언젠가는 내 삶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물음 앞에 서게 하실 하느님의 현존체험에 속한다. 

     

    그런 하느님이 정말로 내 인생을 주관하고 계신지를 확인해보는 간단한 방법이 있다. 그것은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첫 번째 말마디와 행동이 무엇인지 보면 된다. 간 밤의 고민끝에 잠든 사람이나, 별 생각 없이 하루를 습관처럼 시작하는 사람,  온통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다 잠들어서 하루의 고민부터 생각나는 사람에게 하느님은 별로 중요한 분이 아니시다. 하지만 눈을 처음 떴을 때 성호경을 그으며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을 부르고, 짧게나마 '주님! 이 하루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라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삶 안에서 하느님을 호흡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다. 삶의 시작과 마침이 하느님의 것임을 일상의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고백하는 셈이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이름 안에는 우리 믿음의 중심이 담겨 있다. 과연 하느님은 어떤 분이실까 궁금하다면, 그분이 우리 안에 심어 놓으신 당신을 닮은 모습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을 기억하면 된다. 과연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는 누군가에게 사랑 받고 싶고,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한 마디로 사랑하는 것. 그것은 그 누구와 관계에 만들고, 그 관계에 들어서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관계 안에서 태어나, 관게 안에서 산다. 그런데 이 관계성이 철저하게 사랑을 통해서만 형성된다는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랑이란 누군가를 위해서 나를 버리고, 희생하지 않으면 결코 온전하게 완성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갖고 싶은 것을 상대에게 요구하는 관계는 결코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내가 상대를 위해 나를 내어주는 것. 내 욕심과 이기적 욕망을 버릴 수 있는 때 그 힘을 발휘한다. 그 사랑하는 능력이 하느님을 닮았다. 하느님이 끊임없이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시는 그 사랑하는 능력을 우리도 받은 셈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애초부터 사랑이시라고 요한 사도가 고백하듯이,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은 그 어떤 사랑의 대상을 찾으신다.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유대인들이 알려준 야훼 하느님이 절대 초월의 유일하신 인격신으로 생각해왔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한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 즉 당신 스스로 관계를 필요로 하시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사랑은 본성적으로 자신을 내어주는 것으로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부(聖父)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고 섭리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 아버지는 엄한 가부장적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그 잘못을 묻지도 않고 얼싸 안으며 받아주시는 아버지, 죄를 짓고 돌에 맞아 죽을 간음한 여인에게 죄를 묻지 않으시고 해방을 선포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리고 성자(聖子)는 이 세상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나머지 인류 역사에 직접 들어오셔서 인간이 되시고, 인간과 사귀시고, 인간의 죄와 죽음을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구원과 자유를 내어주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우리가 믿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이시다. 그리고 성령(聖靈)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영, 세상의 창조부터 마침까지 세상의 피조물과 인간의 영 안에서 머물면서 만물에 생기를 주시고, 위로와 격려해주시며, 일치와 자유를 선사하시는 주님의 영이시다.

     

    초기 예수님의 제자들과 신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거룩한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그분의 말씀과 행적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체험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하느님의 절대적 현존을 예수 그리스도의 빵 나눔의 잔치를 통해서, 그분의 말씀을 되새기는 가운데 그들 마음을 뜨겁게 데우시고 열어주시는 성령을 동시에 체험했다. 이렇게 체험된 하느님의 세 이름을 그들은 각각의 독립된 신적인 능력이자 힘으로 고백하면서도 결코 하느님은 세 분이 아니시라 한 분이시며, 이 세 신적인 격(위격)이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는 성삼위의 내밀한 일치를 통해 본성상 같은 하느님이심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앙은 어려운 신학적인 이해에 앞서서 단순하게 고백하자면, 우리가 믿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신비에 대한 고백이라고 말하면 된다. 그냥 하느님이 역사 안에서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시는 방식에 대한 신비이다. 그래서 성호경을 긋고 하느님의 성삼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우리 신앙의 전부이자 진수를 말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의 놀라운 기적을 우리 스스로가 체험할 수만 있다면 진정 하느님을 맛보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언젠가 우리 생을 마칠 때 하느님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만일 내가 평소에 하느님을 사랑 가득한 분으로 믿고 자주 그분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유와 해방, 치유와 용서, 일치와 평화를 구하며 산다면 내 생의 마지막 순간에 하느님을 기쁘게 만날 수 있다. 평생 그리워하던 하느님을 비로소 만나게 되었으니 자신 있게 내 영혼을 아버지께 맡기며 희망 속에서 잠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루를 마칠 때마다 성호경을 긋고, "주님,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라는 기도와 더불어 마칠 수 있다면 하느님은 내 생의 시작이요, 마침이고, 내 생의 모든 것이란 믿음을 몸으로 실천하는 셈일 것이다.

     

    내가 만난 하느님, 내가 원하는 하느님이 아니라, 나를 원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려고 한다면 분명히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주실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라... 그러면 하느님을 알리라."는 외침이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 나오게 되길 기도한다.

     

    2014. 6. 15

     

     

     

    뒤러, <성삼위에 대한 경배>, 1511년, 패널에 유채,
    135x123cm, 빈 미술사 박물관 (성화 설명: 인천주보 3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