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말씀신부님의 강론말씀 코너입니다.
  • 2014.04.01
    9832014.04.01

    유혹을 이기는 법 - 사순 제1주일 강론

     

     

    송용민 신부

     

     

    사순시기가 시작되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전례시기이지만 이 시기에 얼마나 의미를 부여하면서 보내느냐에 따라서 교회 전례가 우리에게 요청하는 신앙의 체험이 달라질 수 있을 듯 싶다. 각자의 인생에도 반복되는 일상의 삶에 어떤 가치를 부여하느냐에 따라서 세상이 달리 보이고, 자신의 인생가치가 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인듯 싶다.

     

    사순시기에 신자들에게 요청되는 덕목은 당연히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하는 영적인 회심이다.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 없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할 수 없듯이 우리도 세상에서 분명히 져야할 십자가와 영적 회심 준비가 있어야 참된 부활절의 기쁨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과 보속, 절제와 금욕의 삶을 통한 사순시기의 체험에로 모든 교우들이 초대되기는 했지만 사실 신앙 생활 속에서 내가 결심한 내용들을 온전히 지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결심을 흔들어 놓는 가장 큰 힘은 익숙해진 내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가게 하는 유혹일듯 싶다. 유혹이란 말은 느낌 그 자체로 내가 해야 할 일, 해야만 하는 일을 자꾸 미루거나 핑게를 대고 회피하게 하는 부정적인 힘을 뜻한다.

     

    요즘 세상이 정도(正道)를 걷기에 너무 많은 유혹들이 있어서 유혹을 이겨내기 보다는 유혹을 즐기는 세상이 된듯 싶기도 하다. 지루하고 평범한 삶 속에 내 삶을 흔들어 놓을 만한 유혹거리가 있다면 차라리 삶이 생기 넘칠 것 같다는 웃지 못할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대부부의 유혹은 우리들의 삶의 질서를 망가뜨리고, 영적 식별 능력을 흐리게 하는 악한 영들의 작용임을 안다.

     

    창세기의 3장에 등장하는 에덴동산과 아담 하와 이야기는 이런 인간의 유혹에 따른 죄의 상황을 원인론적으로 해석해낸 설화이야기이다. 하느님이 세상과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이라고 부르는 동산에서 인간이 최고의 행복을 누리도록 마련해주셨는데 그 행복이 깨지게 된 첫 번째 범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말해준다. 거기에는 유혹자의 등장이 눈에 띤다. 간교한 뱀은 하와에게 묻는다.  "하느님께서 '너희는 동산의 어떤 나무에서든지 열매를 따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정말이냐?"(창세 3, 1). 사람에게 의혹을 일으키는 교묘한 질문이다. 하와는 동산에 있는 나무 열매는 뭐든 다 따먹어도 되지만, 선과 악을 아는 나무 만큼은 건드리지 말라고 하느님의 계명을 언급한다. 하지만 뱀은 그런 하와에게 자신의 논리에 빠지도록 유혹한다. 하느님이 명령하신 것은 하느님이 자기와 같아지지 못하게 하려는 술책과 같은 것이란 말이다. 생각해보니 왜 유독 그 금단의 열매만을 먹지 못하게 하셨는지 자기 논리에 빠진 하와는 그 열매를 보고 슬기롭게 해줄 것 같다는 탐욕을 갖기 시작한다. 결국 하와와 아담은 그 열매를 먹음으로써 자신들이 하느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하면서 갖게 되는 수치심과 죄의 어두움을 체험한다. 더 이상 하느님께 나서지 못하고 숨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인간에게 심겨진 하느님의 법 가운데 인간은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수치심이란 것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이 스스로 그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도 지속적인 죄의 상태에 빠지만 인간의 양심은 무뎌지거나 왜곡되는 현상도 발생한다. 일종의 죄의 합리화 혹은 죄의 주관적인 평가가 일어난다.

     

    예수님을 광야에서 유혹한 사탄의 이야기는 그런 유혹과 죄의 매커니즘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마태 4, 1-11)

    광야에서 하느님과의 인연을 새롭게 이해한 예수님은 단식을 통해 육신의 욕망을 벗어버리려는 인간적인 수행의 길로 나선다.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가장 큰 유혹인 배고픔을 느낄 때 사탄은 인간의 가장 나약한 부분을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그를 무너뜨리고자 한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의식을 가진 예수에게 첫번째로 교만의 유혹과 배고픔을 채우려는 욕망을 동시에 일으키고자 한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마태 4, 3). 배고픔의 고통을 느껴본 사람만이 이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 수 있다. 요즘 현대인들이야 먹거리가 풍부해서 배고픔을 느낄 새도 없지만, 과거 전쟁을 겪은 세대나 보릿고개의 아픔을 겪어본 사람들은 먹을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먹고 싶은 욕망, 심지어는 돌을 삼켜 먹고싶은 생각이 들 정도의 배고픔은 참기 힘든 욕망에 속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한 수용자가 발견되면 그 방에서 무작위로 10명을 뽑아 아사방에 넣는 벌을 내렸다고 한다. 아사방이란 그야말로 물 한 모금 없이 굶어 죽게 하는 곳인데 참으로 처참한 것은 그곳에 갇히면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길 포기하면서 서로 잡아 먹으려는 동물적 본능까지 보인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큰 약점인 배고픔과 교만의 유혹을 예수님은 이겨내신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 4) 인간이 흙과 하느님의 영으로 만들어졌으니 육체적인 만족만으로는 결코 인간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물질적인 풍요가 아무리 인간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해도 영적인 갈망과 영적 배고픔은 언제나 공허하게 남기 마련이다. 영혼을 채워주는 것은 물질이 아닌 영적인 가치들임을 분명히 하시는 것이다.

     

    사탄은 교묘하게 두 번째 유혹을 시도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예수님이 뛰어내린다면 천사들이 다치지 않게 그를 보호해줄 것이라는 논리이다. 제법 논리가 그럴 듯하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면 그냥 떨어져 죽게 만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유혹은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자주 발생하는 유혹에 속한다. 제법 성경을 알고 신앙 생활을 좀 했다는 사람들이 자주 쓰는 논리들 가운데,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니 내 가끔의 일탈과 죄 정도는 용서해주실 것이란 자기 합리화의 덪이다. 조금 돈을 위해 욕심을 내거나, 사람들을 미워하는 일, 정당하지 못한 일들을 하면서도 남들도 다 하는 데 나만 무슨 죄인가라는 식의 자기 합리화가 결국 인간을 망가뜨린다. 물론 자비의 하느님에 대한 신뢰와 인간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자신은 죄와 모순을 자기 논리에 맞춰 하느님과 맞거래를 하려는 태도는 가장 위선적이고 교만한 태도에 속한다.

     

    예수님은 이런 유혹에 대항해서 "주님이신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고 경고하신다. 하느님은 결코 자판기처럼 우리가 필요할 때 나타나시고, 필요 없을 때 잊혀지는 그런 분이 아니시란 말이다. 최근들어 한국천주교 신자들이 500만명이 넘었다고 좋아하지만, 점점 늘어가는 냉담자 숫자는 우리 교회가 처한 현실을 말해준다. 하느님은 내가 필요할 때만 찾는 분이시고, 내 삶이 평화롭고 즐거우면 하느님은 언제나 여가생활의 맨 마지막 부분처럼 밀려나 우리 삶에서 멀어진다. 적지 않은 가톨릭 신자들이 주일 미사의 의무를 그저 지켜야할 의무 정도로 생각하지 자신이 하느님께 봉헌해야할 시간과 삶의 의미는 잃어버린다. 많은 신자들이 이미 냉담을 경험했고, 잠재적 냉담자와 스스로 신앙의 안식년을 지키려는 이들이 늘어나는 현상을 보면 신앙이 결국 밥 먹여주냐는 자조섞인 말도 들릴 만하다.

     

    사탄의 세번째 유혹은 그야말로 마지막 꼼수에 속한다. 그는 예수님과 최후의 빅딜을 하고자 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가장 큰 유혹. 세속적인 즐거움과 만족을 주겠다는 확실한 약속이다. 세속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돈과 재물, 명예와 부귀 영화를 한 번에 보여주고, 그 것을 모두 줄테니 자신의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하란 말이다. 이 말은 요즘 말로 치면 내가 로또 1등 30억짜리 당첨시켜줄테니 더 이상 성당에 다니지 말라는 유혹과도 같다.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라 생각하면 그냥 코웃음 칠 일이지만, 실제로 그런 유혹 때문에 성당으로부터 발을 끊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다. 세속적인 즐거움과 만족이 크면 자연스럽게 하느님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마련이다. 인간의 간교함이 뱀의 유혹 앞에서 빠지는 자기 욕망의 덪에 빠지게 하는 셈이다.

     

    예수님은 이런 사탄의 유혹에 단호하다.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말씀하시고, 주 하느님 한 분만을 경배하고 섬기라는 말씀을 하신다. 세속적인 것이 내 삶의 중심이 될 때 인간은 하느님을 잊는다. 세상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인간이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선뜻 택할 수 없는 하느님의 길에 대한 망각이 인간에게는 늘 비수처럼 따라오는 셈이다.

     

    사실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은 인간이 받는 유혹들에 대한 연대적 동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런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하신다. 세속적인 가치들이 자신의 삶을 집어 삼키려 할 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참으로 나를 완성시키는 하느님의 현존에 감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세상에서 가장 큰 유혹은 하느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귓속말로 속삭이는 사탄의 음성이다.

     

    우리 각자가 안고 있는 삶의 무게 만큼이나 인생의 가치들의 혼란도 적지 않다. 세상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것들은 너무 왜곡된 진리이고, 인간의 탐욕적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런 세상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길을 걸어갈 수 있으려면 우리 안에 영적 식별능력이 필요하다. 세상 속에서 하느님의 가치를 찾아내는 능력. 바로 영적 감각이 필요한 셈이다.

     

    그런 영적감각은 하루 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마음을 가꾸는 노력과 영신수련, 특히 기도와 양심성찰을 통한 자기 수행이 있어야 성장한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이 습관적으로 주일 미사 참례나 의무적인 신앙 생활에 만족하며 살기 때문에 신자로서의 선의를 가지고 사는 데에는 익숙하지만 영적인 체험과 성장을 느끼지 못하고 냉담의 유혹에 빠지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시대가 영의 혼란 시대이기에 더욱 굳은 성령의 은사를 필요로 한다. 비록 우리들의 나약한 인성 때문에 자주 유혹에 넘어가고, 악과 타협아닌 타협을 해가면서 살지만, 그리스도이들에게는 세례 성사때 받은 성령의 은사를 일깨울 수 있는 영신수련도 필요하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비법처럼,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하느님을 내 잣대로 판단하고 시험하지 않도록, 그리고 나를 유혹하는 세력들에 대해 용감하게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외칠 수 있는 그런 용기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사순시기가 아닐까 싶다.

     

    2014. 3. 9

     

     

     

     

    봄이 기다려집니다. 여전히 겨울의 끝자락이 맹위를 떨치는듯 하지만, 봄은 결국 오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