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강화성당의 설립

강화성당의 설립
 
병인박해(1866) 이후 강화도 지역에 다시 신앙의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이 아가다라는 교우를 통해서였다. 서울에서 살던 이 아가다의 부모가 병오박해1를 피해 충청도 홍성으로 이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병인박해 때 순교를 하게 된다. 이에 부모를 잃은 3남매는 유리걸식을 하다 두 남매는 어린 나이에 죽고, 이 아가다만 강화도로 오게 된다. 1871년, 이 아가다는 외교인2 김해 김 씨와 관면혼배3를 하고 대산리 3번지 돌모루에 살면서 남편을 세례 받도록 했다. 그 후 이 아가다는 딸 김부엉 루이사를 9살 되던 해에 제물포 본당 구내 샬트르 바오로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던 보육원으로 보냈다. 보육원에서 자라던 김 루이사가 17세 되던 1909년, 당시 답동본당 주임 드뇌(1873~1947) 신부는 루이사와 영종도 교우 안일만 바오로를 혼인하도록 하였다. 1922년 봄, 안일만 가족은 강화읍 대산리 돌모루로 이사하여, 슬하에 안영진(일명 순흥) 아가다와 안경옥 필립보, 안경남 라우렌시오 3남매를 키우면서 신앙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강화본당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이 아가다와 그녀의 딸 내외가 살며 전교활동을 하던 대산리 마을은, 한국전쟁 후 북한과 인접한 지리적 여건으로 인하여 현재는 민간인 출입통제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그녀가 처음 살던 곳은 현재 잡풀이 우거진 채 철조망으로 막혀, 민간인의 접근은 물론 사진 촬영도 금지되고 있다.

1925년, 충청도에서 하점면 부근리와 송해면 하도리 지역으로 이사 온 천주교 신자들이 옹기점을 경영하며 신앙생활을 하였는데, 안경수 토마 전교회장(교리교사)이 대산리와 하도리 등지를 다니며 유아세례를 베풀었고, 답동본당 드뇌 신부와보좌 이여구(마티아)신부가 부근리공소를 방문하여 신앙공동체를 돌보았다. 그러나 옹기마을의 운영이 잘 되지 않아 신자 도공들이 마을을 떠나게 되어, 1935년 부근리공소 모임도 자연 중지되고, 대산리공소로 통합하게 되었다.
 
1928년에는 충청남도 서산군 팔봉면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양촌명 외 9명의 신자들이 온수리 독점마을로 이주해 온다. 처음에는 하점면 부근리공소로 다니며신앙생활을 하다가 신자 수가 늘어나자 1933년 6월 정태준 안드레아의 집을 이용하여 온수리공소를 시작하였고,이때 답동본당 보좌 신부인 나 라가르드(1903~1988) 신부가 공소를 방문하였다. 당시 교우 수는 20여명이었다. 대산리에 살던 안일만 부부도 처음에는 부근리공소로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였고, 1931년부터 같은마을 노창빈(세례명 베드로) 가족을 대상으로 전교하여 1934년 12월에 노창빈이 세례를 받고, 같은 날 삼산면 송가에 사는 56세 된 이 루이사도 함께 세례를 받았다.
 
노창빈의 집
 
공소로 사용되던 노창빈의 집
당시로는 유리로 만든 창문이 있던 집이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리창 집’이라 불렀고, 지금도 그 유리창 문은 남아 있다
 
 
 
 
1935년부터 노창빈의 집 안방을 공소로 이용하기 시작하였고, 교리지도를 한 결과 노창빈의 가족들이드뇌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1939년 2월, 노창범 요셉과 동생노창현 안드레아, 이연선(李連善) 토마와 그의 아들 이순창 사도요한, 윤순철 베드로, 강엄전 안나, 황윤익 레오, 권영성 프란치스코, 노형진 야고보 등 여러 사람이세례를 받았다.
 
 
구호물자 배급
구호물자 배급
‘사랑의 집’에서 밀가루를 나누어 주고 있다. 이때 믿음도 없는 사람들이 밀가루를 더 타려는 마음으로 입교하여 신자가 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주위사람들은 이들을‘밀가루 신자’라고 불렀다
 
 
 
 
오래된 신자들의 말에 의하면, 이 당시 신부는 인천에서 배를 타고 강화도의 남쪽 초지진에 도착한 다음, 강화도의 북쪽인 이곳 대산리까지 먼 길을 걸어와야 했다. 이때 신자들은 더리미, 오두리, 부근리, 멀리는철산리에서까지 자신들이 먹을밥을 싸들고 이곳까지 걸어오곤 하였다 한다. 한편 안일만의 장녀 안영진 아가다는 1935년 포천에서 이사 온 이재명(李載明)야고보와 결혼하여 강화읍에서 새 삶을 시작하였다. 이재명은 전교회장직을 맡아 대산리공소와 읍을 오가며 전교하였고, 1943년에는 후에‘그리스도 사랑의 집’이라 불리던 곳으로 이사하였다.대산리공소는 해방 이후까지 존속되다가 한국전쟁의 발발로 폐지되었는데, 전쟁이 끝난 1952년에는 이재명이 북에서 피난을 온 최명선(바오로), 김병태(베드로),유시현, 김홍근(방지거) 등과 함께 최명선의집을 공소로 정하고 공소예절4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때 그들은 인천 답동성당의 정덕진(루카) 신부를 초빙하여 지도를 받으며 미사를 봉헌하곤 하였다. 
 
이러한 열성적인 신자들의 적극적인 전교활동에다 한편으로는 미국 가톨릭 주교회의 원조기구인 가톨릭구제회 NCWC)의 구호물자 배급이 더해져,많은 사람들이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한국전쟁 후 흉년이 닥치자, 가톨릭 구제회에서 전국적으로 구호물자를 배급하기 시작하였으나, 강화도에는 별 혜택이 없었다.
노기남 주교이에 1955년 이재명이 단독으로 서울로 올라가 노기남 주교께 양곡지원을 부탁하였고, 가톨릭 구제회측에서는 이재명으로부터 강화도 신자들과 군민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고 밀가루, 보리가루, 분유 등대량의 구호물자를 지원해 주었다. 그 결과 1956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이루어진 구호물자의 배급은 강화도에 신자 수의 증가를 가져오기도 하였다.1956년, 이재명, 최명선, 노창성 등을 비롯한 여러 공소 신자들은 성당 건립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우선 성당 부지 매입자금의 일부를 확보한다. 그리고 이재명이 다시 상경하여 노기남 주교에게 사정을 설명하자, 노기남 주교는 장금구(당시명동 주임) 신부에게 성당 부지 매입을 알리고 부족한 자금을 보조하였다. 그리하여 강화읍 관청리 643번지, 현재의 성당 부지를 매입하게 되었다.
 
그해 겨울, 김포본당 신원식(루카) 신부가 성당 부지를 살펴본 뒤, 인천 답동본당 소속의 강화공소가 서울교구 김포본당(1948년 설립) 소속으로 인가를 받게 되었다(1957년 11월 11일). 곧이어 서울에서 노기남 주교를 위시하여 장금구, 정덕진 신부 등이 수차례 공소부지를 둘러보았으며, 그 결과 강화공소는 1958년 1월 29일자로 본당 설립인가를 받아 강화성당으로 승격되었다. 강화신자들의 오랜 숙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며칠 뒤(2월 5일), 장금구(莊金龜) 크리소스토모 신부가 10여 명의 성직자와 함께버스 2대에 나누어 타고 초대본당 신부로 부임하였다.
 
신부 이름‘金龜’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중국식 표기로,‘황금의 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는 뛰어난 설교로 수없이 많은 전교활동을 한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본당설정당시신자들은이재명의자택‘( 사랑의집’)을양도받아이곳을임시성당으로 사용해 오다 1960년 성당과 사제관 건립을 시작하였다.
트위터 페이스북 싸이공감 네이트온 쪽지 구글 북마크 네이버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