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화도와 천주교 - ‘신앙의 증거자’박순집(朴順集)

‘신앙의 증거자’박순집(朴順集)
 
박순집 베드로박순집(1830~1911)은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순교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그들의 유해 발굴에 큰 공을세웠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순교자를 부모로 하여 서울에서 태어난 박순집은 어려서부터 앵베르(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의 심부름을 하며 그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등 독실한 신앙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박순집이 증언자의 삶을 살게된 것은 그의 아버지 박 바오로의삶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기해박해(1839) 때, 훈련도감프랑스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할 때, 박순집은 훈련도감 군인의 신분으로 참여하여 그 참상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그는 곧 교우들과 함께 순교한 신부들과 신자들의 시신을 몰래 거두어 와서에 안장한다. 몇 달 후 그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형 등 16명의 가족들이 순교할 때 박순집은 기적적으로 화를 면한다. 1876년 이후 박순집은 신자들과 협력하여 리델 신부 등 여러 신부들의 조선 입국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1888년, 블랑 주교(조선교구 제 7대 교구장)의 명으로 박순집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묻혀 있는 곳과 자신의 집안 및 다른 순교자들의 행적을 교회 법정에서 증언하게된다. 이 증언들을 모은 것이‘병인사적 박순집 증언록(丙寅事跡朴順集證言錄)’으로, 여기에는 153명의 순교자의 행적이 기록되어 현재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에소장되어 있다.
 
이후 그의 도움으로 와서에 있던 7명의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 삼성산에 묻혀있던 앵베르 주교, 모방·샤스탕 신부의 유해와 노고산에 묻혀있던 남종삼의 유해는 명동성당에 안치되었다. 서울에 살던 박순집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집을 공소로 내놓았으며, 딸은 조선인 최초 5명의 수녀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녀는 82세로 선종할 때까지 평생 보고 들은 것을 자세히 기록해 놓아, 아버지의 증언록과함께 천주교회의 중요한 산 기록이 되고 있다.
 
1890년, 서울에 살던 박순집은 인천의 한 교우의 간곡한 간청으로 인천에서의 전교를 결심하고, 전 가족을 이끌고 제물포로 이사하여 인천지역과의 인연을 맺게된다. 이후 약 20년간 그는 답동성당의 사목을 도우며 전력을 다하여 인천지역의 전교에 힘쓰다 1911년‘예수, 마리아, 요셉’을 부르며 선종하였다. 그의 인천생활은 평신도 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며 오늘날 인천교구 발전에 굳건한 초석이 된 삶이었다. 그의 시신은 인천의 용현동에서 서울의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으로 옮겨졌다가 강화도의 이곳 갑곶 순교성지와 양도면 도장리 소재의 인천가톨릭대학교 교내로 나뉘어 옮겨졌다(2001).
 
박순집 베드로는 치명자는 아니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는 어느 순교자 못지않은 거룩한 삶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죽음을 당하지 않은 순교자’,‘시복되지 않은 복자’,‘신앙의 증거자’,‘순교자 행적 증언자’,‘성웅(聖雄)’등 여러 칭호가 따라다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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