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강화도와 천주교 - 병인양요와 강화도​

병인양요와 강화도​
 
1866년(고종 3) 초, 고종(高宗)의 친아버지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조선에 들어와 있던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많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 목숨을 잃게 된다(병인박해). 이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 침입한 사건을 병인양요라 한다. 병인박해 때 화를 면한 리델 신부는 장치선을 비롯한 여러 천주교 신자들의 도움으로 충청도에서 배를 타고 조선을 탈출, 중국에 있던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에게 천주교 박해 소식을 전하면서 조선에 대한 보복원정을 촉구한다. 
 
프랑스 함대의 조선원정은 2차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9월)는 강화도를 중심으로 한 수도 서울까지의 뱃길을 살피기 위한 예비적 탐사원정이었고, 2차(10월)는 수십 일 간 강화도를 점령, 정족산성 전투까지 벌이는 등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 차원의 무력원정이었다.
 
 
강화성당 내에 있는 진무영 순교성지 - 안내판에 의하면 최인서·장치선·조서방·박서방 등이 이곳에서 순교하였다
 
프랑스 함대의 1·2차 조선원정길에는 리델 신부가 통역으로, 조선인 천주교 신자 최인서(崔仁瑞)·최선일(崔善一)·심순여(沈順汝) 등 3명이 물길 안내인으로 타고 있었는데, 이들은 리델 신부가 박해를 피해 조선을 탈출할 때 그를 따라 나섰던 사람들이었다. 리델은 강화도 땅에 제일 먼저 발을 디딘 천주교 선교사가 되었다.
 
그해 11월, 정족산성 전투에서패한 프랑스군이 퇴각할 때 그들의 배에는 조선인 천주교 신자 10명이 타고 있었다. 위의 물길 안내인 3명과 프랑스군이 강화도를점령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를 찾아 온 김영이(金榮伊), 그리고 작약도에 배가잠시 머무르고 있을 때 조선 내의 천주교 박해상황을 리델 신부께 알리러 온 신자 장치선(張致善)·송운오(宋雲五)·이성의(李聖宜)·이성집(李聖集)·박복여(朴福汝)·김계쇠(金季釗) 등 6명이었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19명의 천주교 신자 중, 최인서·장치선·김계쇠 등은 이듬해(1867) 4월 조선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1년 뒤, 장치선과 최영준은 강화에서 순교한다.
 
“사학 죄인 장치선(張致善)·최영준(崔英俊)이 진무영(鎭憮營)으로 압송되어 효수되었다.”
<일성록>(1868. 5. 22.)
 
‘효수’(梟首)란, 여러 사람에게 경계하게 하기 위하여 죄인의 목을 베어 긴 장대에 매다는 형벌을 말한다. 진무영은 조선 후기 해상방어를 위하여 강화도에 설치한 군영으로, 옛 농협중앙회 자리가 그 터로 알려져 있다.
 
 
갑곶성지(강화읍 관청리-갑곶나루) 내에 있는 박상손·최순복·우윤집의 순교자비
 
 
장치선(張致善: 1830~1868) 5살 때 세례를 받았으나 세례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에 들어와 있 던 프랑스 신부 12명 모두를 경향 각처를 다니며 만날 정도로 열성적인 신자였다. 1866년 박해가시작되자 리델 신부를 중국으로 탈출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한다. 병인양요 후 프랑스 함대가 퇴각할 때 리델 신부를 따라 여러 신자들과 함께 중국으로 갔던 그는 1년 뒤 귀국한다. 서울에서 머물며 칼레 신부의 지시대로, 교우들의 상황을 살피면서 앞으로 조선에 들어올 새 신부를 맞이할 방법을 강구하다가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최영준(崔英俊: 1811~1868) 일명 인서(仁瑞)
경기도 용인사람으로 프랑스 앵베르 주교에게 세례(세례명 요한)를 받았다. 서울 아현동에서 회장직을 맡아 선교사들
은 물론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교류하는 한편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병인박해 때 조선을 탈출하는 리델 신부를 따라 중국에 갔으며, 조선원정의 프랑스 함대의 물길 안내인으로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퇴각하는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중국 상해에 갔다가 이듬해(1867) 장치선·김계쇠 등과 함께 귀국하여 쌀장사를 하며 서울에 머문다. 그리고 1년 뒤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어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 조 참봉의 부친과 함께 58세로 강화에서 순교하였다.
 
엘리사벳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점령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는 강화읍의 큰 길가에서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세 살 난 여자 아이 하나를 발견하였다. 아이의 엄마는 도망을 갔고, 불구자인 아버지는 병들고 먹을 것조차 없어 아이를 키울 수 없다며 리델 신부에게 아이를 맡긴다. 리델은 아이를 갑곶이 부대로 데려와 치료를한 뒤, 군종 신부에게 부탁하여 엘리사벳이라는 본명으로 영세를 베풀어 주었다. 이것이 강화도에서 베풀어진 공식적인 첫 세례 예식이었다(1866). 프랑스군이 강화도에서 퇴각할 때 이 아이는 상해의 한 수녀원에 맡겨졌고, 그리고 후에 그곳에서 죽었다.
 
이 외에도 프랑스 군함을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의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양화진에서 효수형을 당했고, 1870년에는 통진 출신의 권(權) 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1871년 신미양요 때는 강화 출신의 박상손(朴尙孫)·우윤집(禹允集)·최순복(崔順福) 등이 미국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갑곶나루에서 참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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